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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애와 신성의 병렬구조

애인처럼 신이 떠났다.
무언가가 벽을 건너서 올 것이다 Something Will Cross a Wall to Come. 간구인지 선언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 무언가는 오고, 나는 구멍이 나서 그걸 흘린다.
신은 떠나지 않는다. 신은 전부이므로 떠나거나 임하지 않는다. 신에게 버림받았다는 비애는⎯서러움이 지겨워 서럽듯⎯그 비애가 모순이라 비애다. 비애는 늘 실재한다.
영어로는 gratitude라고- 다들 감사해하고 있어요. 그들의 항시적인 감사가 날 압도합니다. 주어지는 모든 경험을 끌어안고, 사물과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며, 각기 다른 남들을 전부 이해해 내는. 심지어 침묵이 아니라 소음 속에서, 일찍 자기보다는 늦게 자면서 그렇게 살다니. 그들은 꼭 신이 된 것 같아요.
신을 응시하면 인격신과 범신론, 중력과 은총이 하수구로 내려가는 물처럼 뒤섞인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정말로 신과 일치해 버린 나머지 최후에 호칭으로써의 ‘신’을 흘려보냈다. 내가 간구와 선언을 흘리는 동안.
제 왼손은 여러분의 오른손보다 훨씬 불온하답니다. 공연을 했는데 아무도 제 손이 아픈 걸 몰랐어요. 이제 음악을 잠시만 쉬려고요. 돌아보니 몰두와 매몰을 분별하지 못했더군요. 진단서를 광고하진 않을 생각이에요. 자기의 부상을 광고하는 모습은 슬프죠. 슬픔 외부의 슬픔. 메타-고독. 이해하셨다면 제가 알아볼 수 있도록 왼손을 들어주세요. 온 사방에 오해가 있고, 오해는 사랑스럽지만, 그 사랑은 제 것이 아니니까.
‘신’과 ‘나’의 경계가 흐려지는 지점을 보통 ‘만남’이라 하지만 어쩐지 나에겐 그게 헤어짐으로 보였다. 신이 되어버리면 내 외부에는 더 이상 신이 없어서, 신을 노래 부르듯 부를 수 없다. 그건
신이 그로 하여금 물 위를 걷게 한다.
“제가 어떻게 물 위를 걷습니까. 두렵습니다. 물 위를 걷는 건 당신의 일입니다. 손을 잡고 같이 가주십시오.”
“fear not, my dear. 난 너와 항상 함께한다. 그리고 여기서부턴 너 혼자 가야 한다.”
“저 혼자 가는데 어떻게 저와 함께하신단 말입니까.”
“내가 너와 항상 함께한다는 건 네가 단독자라는 뜻이다. 단독자로서 가라.”
너무 쓸쓸하고 체제수호적이다.
생명이라면 마땅히 성장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하는데, 가만히만 있는 거죠. 당신들은 성숙하니까 작은 움직임에서도 의미를 찾곤 하지만, 글쎄요. 천 년 동안 1나노미터 나아간 영겁의 달팽이를 상상해 보세요. 시간 대비 거리라는 관점에서, 그는 움직인 걸까요? 아니 더 정확히는, 그가 움직였다고 여기는 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수학이 항상 옳진 않잖아요. 차라리 그가 움직이지 않았다고 여기는 게 더 유효한 영상을 발생시키지 않을까요? 적어도 비애는 실재하니까.
비애의 실재성이 의심된다면, 집단 상담 모임에서 누군가에게 발작이 일어난다고 상상해 보세요.
나는 변두리의 밖에 있어요. 변두리의 밖에 있다고 주장하기가 넌덜머리 날만큼 거기에 있다고요. 아니, 변두리의 밖에 있다는 말이 표상하는 이미지 말고요. 씨팔 이보다 더 쉽게 설명할 수가 없는데 이걸 못 알아듣는다고? 이쯤 되면 못 알아듣는 게 아니라 안 알아듣는 거지. 왜? 당신들 기억의 무게는 존나 가볍고, 당신들의 세계관에는 이게 아예 없으니까. 없으면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당신들은 당신들이 주워섬기는 이미지가 삶을 다 알아서 해주니 그럴 필요가 없겠지. 난 아니야. 난 지금까지 수시로 내 곁에서 영혼들이 죽어 나가는 전쟁을 스스로 살았고, 그 안에서 변증법적으로 진화해 왔어. 세계대전 때 이데올로기들이 우후죽순 쏟아졌던 것처럼. 나는 내가 원하지 않은 진화가 날 통해 현현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어. 나는 소리나 빛이라면 노이즈요, 프로그램이라면 버그야. 예수 그리스도가 왜 뒤졌는지 알아?
비의esoteric 연구에 따르면, 종파를 막론하고신비를 체험한 사람들은 주변으로부터 이전과 다른 대우를 받게 된다고 한다. 가령 불특정 타인과 눈이 마주치는 횟수가 확연히 많아진다던가, 혹은 상사의 태도가 친절해지거나 불친절해진다던가, 후배들이 갑자기 자기를 존경하거나 무서워한다던가, 오래된 지인에게서 데이트 신청을 받는다던가.
charming. charm. 마법의 기원은 유혹이다. 그러므로 신성은 사실 성애 친화적이다. 감사하는 이는 사랑스럽다. 포용적인 이는 섹슈얼하다. 반면, 벽을 건너오는 속삭임을 흘리는 이는 위협적이다. 고통을 돌파하지도, 끌어안지도 못하는 달팽이는 추하다.
이 발작이 비애인 이유는, 이것이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화자가 지칭하는 대상이 복수(당신)이기 때문이지요. 만약 한 예술가가⎯혹은 신학도가⎯어디 파티에서, 혹은 소개팅 나온 회사원 앞에서 저런 소리를 했다면 오히려 유머러스한 구석이 있었을 거예요. 그러나 파티도 회사원도 없었어요. 그래서 비애는 실재하는 것이고요. 그러니 이제 그만 꺼져주세요. 당신들을 상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침묵이야. 나는 유학도 가지 않았고, 영어도 못 하고, 아는 사람이 없고, 활동 대신 노동을 하며, 교회에 나가지 않아요. 나에겐 성애의 자격인 ‘포용적인 태도‘나 ‘감사하는 마음’이 없어요. 나에게도 신성이야 있지만, 어쩐지 내 신성은 사랑스럽고 섹슈얼한 당신들의 신성과는 다른 모양이에요. 내 마법에 홀렸던 사람들은 모두 내가 아니라 나의 이미지를 우상처럼 숭배한 것이었죠. 좆 까, 나는 이미 변두리의 밖에 있고, 이제 변두리의 밖에서조차 나가겠어요.
그렇기에 애인처럼 신이 떠났다. 신은 떠나거나 임하지 않으므로 떠난 것은 나다. 나는 신의 주소를 알지만 그를 만날 수 없다. 새파란 신비체험이 지난 성애의 기억처럼 남았다. 그간 내게도 감사한 유혹들이 왔었지만, 나는 누구와도 신이 될 수 없었다.